난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. 좋은 건지 나쁜 건지, 책을 쓸데없이 많이 사곤 했다. 사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주체를 못 했다. 일종의 충동구매이자 탐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. 그러다 보니 집안에는 사놓고 읽지도 않은 책 또한 많이 쌓여 있었다. 꽂아 놓을 책꽂이도 없이 겹겹이 누워있는 책들이.. (물론 지금은 상당량의 책을 팔았다.)
하지만 느린 속도나마 있는 책들을 다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. 다만,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. 집에 있는 책들을 빨리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. 나는 영화든 책이든 진정으로 제대로 봐야 한다면 두 번 이상은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이다. 웃기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실천은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. 그러던 어느 날,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. 책을 읽고 나서도 그 내용을 기억 못 하면 무슨 소용일까? 한 번씩 슥슥 읽고 넘겨버리는 책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걸까? 책을 안 읽는 것만 못한 게 아닐까? 시간 낭비 아닐까? 나는 일종의 지식의 폭주 속에 허우적대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?
하지만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해본다.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걸까?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니다. 아무리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 못 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구절이나 장면 몇 개정도는 기억나게 마련이다. 아니, 한 번에 많은 양이 기억나길 바라는 게 애초부터 오버다.
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보면, 꼭 책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닌 듯하다. 그 모든 것을 흡수하면 그것이야말로 ‘폭주’다. 수많은 지식, 정보, 스토리에 파묻혀 책 속의 세상에 갇혀 버리고 나의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만다. 오히려 소수의 기억나는 장면, 구절들이야말로 나에게 정말 필요한 부분이었기에 기억나는 것이 아닐까. 오히려 꼭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에 나머지는 걸러준 것이 아닐까.(그렇다고 두 번 안 보겠다는 소리는 아니다.)
어떤 분야든 절제의 미학을 나이가 들수록 느끼게 된다. 책의 내용이 기억나면 기억나는 대로, 안 나면 안 나는 대로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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